덕산선감(德山宣鑒, 782~865)
덕산선감(德山宣鑑) 선사는
중국 당나라 검남(劍南) 출신인데 성은 주(周)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율장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성상(性相)의 교학에 통달하여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강설하였으므로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 하였다.
덕산 선사가 천하의 덕산 선사라는 이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유명하여
간략히 기록한다.
어느 날 중국의 남쪽 지방에 선불교가 성행하여 교학을 무시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한다는 말을 듣고는
남방의 그와 같은 외도들을 쳐부수어
불교를 바로 세우리라는 용맹심을 일으켰다.
그동안 연구하여 기록한 금강경의 연구논소들을
한 걸망 짊어지고 떠났다.
여러 날을 걸려 남방의 어느 도시에 이르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저자를 지나다가 떡을 파는 노파를 발견하고
떡을 사서 점심을 때우리라 생각하였다.
떡을 파는 노파가 떡은 팔지 않고
덕산 선사가 지고 다니는 걸망을 물었다.
“스님은 걸망에 무엇을 지고 다닙니까?”
“예, 금강경과 연구논소들입니다.”
“그렇다면 금강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만약 대답을 하시면 떡을 팔고 대답을 못하시면 떡을 팔지 않겠습니다.”
“금강경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물으십시오.”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덕산 선사는 그만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떡도 사먹지 못한 채
노파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훌륭한 선사가 있습니까?”
“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용담 선사라는 분이 계시니
그분에게 가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선사의 만남과 유명한 대화가 역사에 남게 되었다.
덕산선감 선사가 처음 용담에 이르러 물었다.
“오랫동안 용담을 부러워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못도 없고 용도 없도다.”
용담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친히 용담에 이르렀도다.”
덕산선사가 예배를 하고 물러나왔다.
덕산은 용담숭신(龍潭崇信) 선사에게서 크게 깨닫고
예양(澧陽)에서 30년을 머물며 교화를 폈으며
당나라 무종(武宗)의 파불(破佛)의 난을 만나
독부산(獨浮山)의 석실(石室)에 들어가서 난을 피하였다.
그리고 뒷날 대중(大中) 연간에 불교가 부흥할 때
무릉태수(武陵太守)인 설연망(薛延望)의 부탁으로
덕산정사(德山精舍)에 들어가 종풍을 크게 떨쳤다.
도풍(道風)이 준험(峻嶮)하여 천하의 승려들을 몽둥이로 다스렸기 때문에
‘덕산방(德山棒)’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산(潙山)이나 동산(洞山), 임제(臨濟)의 도풍과는 사뭇 달랐다.
함통(咸通) 6년 12월 3일 문득 제자들에게
“하늘을 문지르고 울림을 좇아 너의 심신을 괴롭히니
꿈에서 깨면 그릇된 것을 알 터인데 마침내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말하고,
말을 마치자 편안히 앉아 입적했다.
세수(世壽) 84세고, 승랍(僧臘) 65세다.
제자가 대단히 많아 암두전활(巖頭全奯)과 설봉의존(雪峰義存),
서룡혜공(瑞龍慧恭), 천주와관(泉州瓦棺), 쌍류위지(雙流尉遲) 등이 있다.
칙시(敕諡)는 견성대사(見性大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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