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계좌 : 카카오뱅크, 3333-09-9022383 김중완(좋은 노래와 글의 바탕)
☞ ‘The Show Must Go On’
레전드 나훈아
며 칠 전 추석맞이 나훈아 비대면 콘서트가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 이제 그의 나이도 70이 한참 넘었을 텐데, 그 또래 나이와 비교하면 목소리의 힘이 무척 젊다. 그건 매일 매일의 노래 연습이 없다면 힘들다. 진정 프로페셔널이다.
나훈아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군사정권 체제가 불편해 할 그런 가사의 노래도 종종 불렀다. 그중 대표적인 곡이 ‘녹슬은 기찻길’과 ‘대동강 편지’이다.
한국 근대 산업화가 정착되면서 대중가요는 고향에 관한 노래가 드물어졌다.
농촌 출신 노동자들은 60년대 이후 산업화시기에 각자 살던 곳을 떠나와 서울 변두리 쪽방 촌이나 공단 인근에 여럿이 기숙하는 가리봉동 등의 벌집생활을 하며 힘든 노동의 시간을 고향을 그리며 견디었다. 그래서 60, 70년대 유난히 고향노래가 많았다.
그런데 고향노래는 거의 남쪽지방 대상이다. ‘그리운 고향 내 고향 남쪽 바다’ 류가 다수를 이루는데, 하지만 그때에도 지금보다 북한 이산가족들이 많이 있었고 연령상으로 훨씬 젊은 나이 때 이며 두고 온 북쪽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역시 절절했다.
그런 정서를 대중음악 종사자들이 놓칠 리 없다. 특히 트롯 작사가들. 하지만 ‘그리운 북쪽 내 고향’ 이런류의 노랫말이 거의 없다.
그건 당시 작사가들이 북쪽 고향에 관한 가사를 쓰면 감옥에 잡혀간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렀기에 북쪽고향에 관한 노랫말을 절대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시절.
한참 후에 북쪽고향에 대한 애환을 다룬 노래가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이’로 유명한 ‘라구요’란 노래가 나오긴 했었다. 그것도 시절이 좋아진 이후에나 만들어진다.
그래도 특이하게 70년대 나훈아의 ‘녹슬은 기찻길’로 자기 검열 속에 어떻게 등장했는지, 생각해보면 용감무쌍한 노래의 등장이었다.
![](https://i.ytimg.com/vi/LIVtu-O7RkQ/mqdefault.jpg)